눈 스케치에 나섰습니다. 눈은 이미 그쳤습니다. 어디 다른 거 없을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만, 기본부터 챙기며 차차 떠올려 보기로 합니다. 서울 시내 경사가 많은 동네를 찾습니다. 쌓인 눈이 미끄러워 양팔을 벌린 채 뒤뚱거리는 출근길 시민을 사진에 담는 것이 1차 목표.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극적(?)인 그림이 되겠지’라는 ‘못된 생각’을 하면서 또 그런 생각을 애써 떨쳐내면서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닙니다. 사실 이날 받은 일에 마음이 크게 동하지 않았습니다. 뭐 그런 날이 있습니다. 큰 의욕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날은 이상하게 그림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일단 이동. 서울 창신동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경복궁으로 이동했습니다.
경복궁은 제설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문화재보호재단에 속한 직원들이 전통 복장을 착용하고 넓은 궁궐 마당을 제설도구로 밀고 쓸었습니다. 한쪽 귀퉁이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넉가래를 밀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든 한 남성이 이 여성들을 담았습니다. ‘붉은 한복 곱게 차려 입고 하얀 눈을 치우는 모습 뒤로 궁의 모습이 보인다’면 어느 누군들 사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다가갔습니다. 동료들과 어울려 웃으며 넉가래를 밀던 한 여성이 먼저 카메라를 들고 서있던 남성을 향해 “저기요. 얼굴을 찍으려면 허락받고 찍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요? 내가 그쪽 허락 없이 사진 찍으면 좋겠어요?”하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나를 직접 겨냥하진 않았지만 덩달아 놀랄 수밖에요.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을 때 그 난감함이란. 셔터 한 번 누르지 못한 나는 나의 결백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옆의 남성과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소속과 사진 찍는 목적을 밝혔습니다. 동의를 구한 것이지요. 그게 상식이며 또 그 여성이 조금 전 강조했으므로. 하지만 이 여성은 정색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식으로 문화재보호재단에 공문을 넣고, 재단 도장이 찍힌 공문을 가지고 와서 얘기하세요.”하고 쏘아 붙입니다. 동의를 구하래서 구했더니 공문을 가지고 오라니. “찍지 말라” 한마디면 될 것을. 그 말과 태도에 쓴웃음을 물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하고 즉시 돌아섰습니다. 어쩌다 당하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마음을 좀 누그러뜨리고 나의 쪽팔림을 회복할 말 한마디를 무기처럼 갖고 있지 못한 제가 좀 안타까웠습니다. 민망한 싸움이 되는 수가 있기에 피하는 게 답이었지요.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지난 상황을 복기하며 ‘아 그때 그런 멘트 하나 정도는 날렸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합니다. 다시 신속히 마음을 고쳐먹으며 ‘피하길 잘했다’며 최종결론을 지었습니다.
오전에 놓쳤던 그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면 반드시 신문에 썼으리라, 하는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다시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눈 치우는 그림이 괜찮아도 함박눈 내리는 것만 하겠습니까. 어차피 못쓸 사진 ‘잘 됐다’ 싶었지요. 나의 간사함이여. 두어 시간 뒤 다시 한 차례 큰 눈이 황사와 함께 내렸습니다. 결국 신문에는 함박눈 사진을 썼습니다.
아침에 실컷 제설작업을 했는데 다시 그만큼 쌓인 눈. 제설작업에 동원된 이들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색하던 그 여성을 떠올렸습니다. ‘넉가래질 힘들어 죽겠는데 한가하게 사진질이냐.’ 뭐 그런 의미였을 것도 같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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