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총의 공통점이 많지요. 셔터와 방아쇠의 유사성으로 ‘shot’이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합니다. ‘찰나의 샷’으로 순간을 멎게 하는 것도 유사합니다. 대체로 검고 묵직한 금속성 외양도 비슷합니다. 총열 덮개를 한 손으로 받치듯 카메라 렌즈를 감싸 쥐지요. 이때 팔꿈치를 가슴으로 당겨붙여 고정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자세도 흡사합니다. 대상을 향해 손끝의 세밀한 감각으로 쏘는 것도 같습니다. ‘앉아 쏴’, ‘엎드려 쏴’ 등의 사격 용어를 사진기자 역시 자연스럽게 쓰고 있으며 ‘빈 총 맞으면 재수 없다’는 것처럼 ‘빈 카메라(필름이나 메모리카드가 없는)에 찍히면 재수 없다’는 직업적 명언도 존재합니다. 메모리카드가 다 차면 ‘총알 떨어졌다’고 하지요. 가끔 카메라가 대상을 두렵게 하는 것도 총과 유사한 점입니다.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죽음(정치·경제·사회적 사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총과 유사한 카메라입니다.
어제 한 장의 사진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두려움 가득 담긴 큰 눈망울과 울음을 문 입술, 벌을 서듯 두 팔을 번쩍 든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터키의 한 일간지 기자가 시리아 난민촌에서 아디 후데아라는 4살 아이를 향해 카메라 들자 이를 총이라 생각한 아이가 겁에 질렸던 장면이지요. 평균적인 아이들은 카메라를 보면 좋아라 합니다. 시리아 내전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아픈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었던 상황을 상상해 다소 무리한 트집을 잡자면, 아이가 카메라를 총으로 오인해 잔뜩 겁을 집어먹었는데 셔터를 눌러야 했는가 하는 겁니다. 카메라 셔터가 눌러진 그 찰나 아이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엄청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이뤄진 촬영에 이런 섬세한 고민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취재윤리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지요. 촬영 뒤 아이를 안아주고 사진을 보이며 안심시켰다고 ‘왜 찍었는가?’라는 트집에서 자유로운 건 아닙니다. ‘독수리와 소녀’를 찍고 취재윤리에 대한 공격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사진가 케빈 카터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진하는 사람에게 쉽게 정리되지 않는 ‘딜레마’지요.
어쨌든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찍지 않았는데도 이 사진은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구구절절한 글보다 나은 ‘사진 한 장의 힘’을 확인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진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내재돼 있습니다. 이 사진이 시리아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기적을 몰고 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총 같은 카메라.
조심히 그리고 잘 다뤄야겠습니다.
yoonjo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