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사진을 찍는 명소가 있습니다. 여름에 빼먹지 않고 한 번은 찾는 곳입니다. 여의도 한강변의 '물빛광장'이지요.
폭염의 기운이 그대로 남은 광장의 물가에서 해 지기를 기다립니다. 열대‘야’이므로 밤 분위기는 나야지요. 출근 때 반바지를 챙기지 못한 걸 후회했습니다. 땀에 들러붙은 청바지에 두 대의 카메라를 어깨에 멘 제 모습은 지나며 마주치는 이들을 더 덥게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요.
해가 저물기까지 제법 긴 시간. ‘치맥’을 잠시 떠올렸습니다만, 근무 중이라는 이유보다 혼자 앉아 먹는 청승승이 싫어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오후8시. 조금 어둑해졌고 셔터를 누릅니다. 매시 정각에 뿜어져 나온다고 써 있는 분수를 기다렸는데 안 나오더군요. 관리직원이 휴가 갔거나, 이 더위에 뭔가 문제가 생겼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어른 무릎 깊이도 안 되는 곳에서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발 담그고 ‘좋아라~’ 합니다. 문득, 열대야라면 시원한 모습이 아니라 진짜 더운 모습을 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새삼스럽게 일었습니다. 누구나 찍는 곳에 와서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사진을 찍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민망해지기도 했었지요.
깜깜해지자 주변의 불빛이 살아났습니다. 밤을 드러내는 건 어둠이 아니라 빛이지요. 불빛 없이 밤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밤바다'로 여행객들을 불러들이는 관광지도 일단 가보면 그 실체는 불빛입니다. 빛이 수놓은 밤바다인 것이지요.
강 건너 아파트와 빌딩 창에 새겨진 빛을 배경삼아 물빛광장을 찍습니다. 이번엔 강쪽으로 가서 여의도를 배경으로 앵글을 잡습니다. 사실, 열대야 사진은 독자로 하여금 ‘시원해하겠다. 발 담그고 싶다’ 정도만 건드려도 성공이거든요. 그런데 여기 앵글은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여의도 고층 빌딩의 불과 광장의 물이 상호작용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빌딩은 대도시가 소비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과시하듯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이 배출되는 각 종 가스는 다시 도심의 대기를 채우고, 지구 온도상승에도 얼마쯤 기여를 하겠지 싶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조금 더 더워진 도시에는 또 그만큼의 ‘물빛광장’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가볍게 찍고 그렇게 읽혀도 될 열대야 사진이 제겐 자연이 되돌려줄 복수의 징후처럼 보였습니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 겁니까.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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