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에 눈이 왔던가, 쌓인 눈은 본 적이 있던가, 싶습니다.
설 연휴 끝나고 출근했더니 강원 영동북부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답니다.
‘누굴 보내야 하나?’하는 부장의 눈빛을 읽었고, “제가 함 가볼까요?”라고 자원했습니다.
대개 ‘함 가볼까요?’라는 말에는 이런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일단 가서 보고, 아니면 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대설’이면 사건·사고의 범주에 드는 사진을 찍어야지요. 내린 눈의 성격에 맞는 사진을 담아야 하는 겁니다. 인제군에 들어서니 날씨는 포근했고 하늘은 파랬습니다. 도로에 ‘대설’이 아니라 ‘소설’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한 번 가볼까요?”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부령이냐 한계령이냐를 저울질하다 한계령을 택했습니다. 양양에서 점심 먹고 서울로 돌아가기 수월할 테니까요. 완만한 고갯길을 오르는데 일찌감치 제설작업을 마친 도로는 깨끗했습니다. 일찍 눈이 내렸고 제설작업도 서둘러 이뤄졌던 겁니다. 연휴 마지막 날 일기예보에 적잖이 긴장했을 지역 공무원들의 확실하고 깔끔한 작업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여하튼 고갯길을 오르는 동안 길가로 치워진 눈이 조금 쌓였고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 가까스로 걸친 잔설도 이내 녹아내리고 있었지요. 대설이긴 했으되 대설처럼 찍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지요. ‘양양에 가서 점심은 뭘 먹을까?’하며 검색창을 띄워 ‘양양 맛집’을 찍으려는 순간에 차창 밖 하얀 풍경과 마주쳤습니다. 해발 700m쯤 됐나봅니다.
채 녹지 못한 눈을 이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이 정오를 넘어선 햇빛을 받으며 반짝거렸습니다. ‘찍을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이면 찍는 게 낫다는 경험칙이 발동합니다. ‘면피용’ 사진 한 컷은 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뉴스에 충실한 폭설사진 대신 풍경사진을 찍게 된 것이지요.
'애초에 기대했던 사진이 지금 이 사진보다 나았을까' 사진을 고르다 생각했습니다. 눈이 유난히 귀했던 겨울이라 눈 덮인 풍경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습니다. 사진에 정답은 없지만 답에 가까운 사진이라 우겼지요. 물론 대설로 인한 큰 피해가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요.
눈 사진 몇 장 찍고 밑도 끝도 없이 삶의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대체로 없지만,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대신 채워지는 순간들이 있지요.
안 된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고 언제든, 기꺼이 나설 수 있기를 저에게 주문을 걸어봅니다.
“한 번 해볼까요!”
그게 무엇이든, 그게 뭐가 되든.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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